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
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만약 그게 ‘계획적인 사람’이라면 나는 반드시 탈락이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ENFP*타입으로 즉흥! 그게 인생이지! 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살았다. 여행 계획을 짤 때에도 절대 빽빽하게 일정을 채우지 않는다. 가장 가고 싶은 장소 하나, 먹고 싶은 음식 한 가지 정도. 그것마저도 잘 못 지킬 때가 많다. 즉흥적으로 내 눈 앞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거나, 가기로 했던 여행지도 피곤하다면 빠르게 취소했다. 계획을 세우면 불행해진다,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다, 라는 기생충의 대사를 가장 잘 인용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계획을 세우면 지나가는 풍경을 놓치고,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면 못 했을 때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니까. 그런 내게 이상한 모임이 하나 생겼는데, 편의상 다이어리 모임이라고 부른다. 그 모임이 무계획 내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중이다.
*ENFP : MBTI 성격유형테스트 결과. 외향적이고 감정적이며, 직관적이고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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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쁜 카페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 갑자기 한 친구가 뜬금없이 다이어리를 챙겨오라고 했다. 버킷리스트를 쓴다고 해서 자주 쓰던 공책과 펜을 들고 약속 장소로 갔다. 영통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 신선하다는 느낌이 제일 컸다. 카페 내부는 만석이어서 우리는 테라스에 앉았다. 그 친구는 우리에게 꿈 리스트라는 걸 주었는데, 교회에서 다이어리 클래스를 들었으니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하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배우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소중한 것, 되고 싶은 것, 나누어 주고 싶은 것. 10-15개 정도를 채웠다. 다른 나라의 전시관들, 입버릇처럼 말했던 남미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갖고 싶은 것에는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 소중한 것에는 내가 썼던 글들과 전시회 때 받았던 포스트잇들을 적었다. 되고 싶은 것에는 예쁘고 다정한 사람, 속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라고 썼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재밌었다. 저 친구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런 것들을 하고 싶었구나, 하며 마음에 드는 건 내 목록에도 추가했다.
상상만 하던 것들을 적어보고, 이야기하고 듣는 동안 내 미래가 조금 명확해지고 있었다. 언젠가 꼭 누군가 내 글을 사서 읽었으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단순히 다이어리에 적고, 그것들을 나누었을 뿐인데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다이어리를 샀다. 감정을 적고 예쁘게 꾸미는 다이어리가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고 다짐하는 다이어리를. 건실한 삶을 위한 일종의 계획표였다. 아주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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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다이어리를 샀는데 쓰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다이어리 내부에는 어떻게 일정을 관리하는지 세부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적혀있었는데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이야기 했을 때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솔직히 속상했다.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의 양을 판단하고, 시간을 배분하는 용도였는데 머쓱하게도 체크리스트가 되었다. 12월의 어느 날, 다시 다이어리 모임 친구들을 만났다. 내 다이어리는 텅텅 비어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꽤나 빽빽했다. 경쟁할 건 아니지만 무척 부끄러웠다. 회사 일이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결국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거다.
그 날 가장 기억에 남는 콘텐츠는 60대까지의 나의 삶 계획하기였다. 일, 가정, 자기 계발, 사회 봉사까지.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계획을 어떻게 세워? 라는 질문이 먼저 나왔다. 예시를 보면서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채워졌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떤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은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고 싶었다. ‘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고 언젠가 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채우다보니 책도 많이 읽어야겠고 전시도 더 많이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더 나아가서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도 구체화됐다. 살면서 책을 5권은 내고 싶었고, 에세이, 여행지, 잡지 죽기 전엔 동화책도 한 권 써보고 싶었다. 언젠가의 소원이었던 독립서점을 내려면 30대에는 돈을 얼만큼 벌어야한다는 애매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졌다. 이렇게 살다보면 2호점도 되겠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제야 알았다. 왜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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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저냥 살아도 인생은 살아진다. 직업이 있다면 출근하고 퇴근하는 걸로 하루는 끝나고, 일이 없을 땐 그냥 누워만 있어도 하루가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이 뿌듯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 있는’ 상태인 거다. 나는 그럴 때 무기력함을 느낀다. 무기력함이 지속되면 우울함이 찾아온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그러나 이미 그 정도 상태가 되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좌절의 연속일 뿐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주위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라는 거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말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건데, 계획표는 말하자면 소문을 내는 일이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적으면 언제 해야할지, 어떻게 시간과 돈을 분배할지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그러면 이건 곧 ‘실행’이 된다. 뭔가 하나씩 해내다 보면 내 자신이 또 기특해진다.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갈 때마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생을 ‘실행’하는데 쓰는 것, 그게 진짜 사는 게 아닐까?
여전히 다이어리를 쓰는 일이 무척 어렵다. 그래도 이제는 출근하면 앉아서 다이어리를 펴는게 조금씩 습관이 되고 있다. 오늘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번 주에는 시간 분배를 어떻게 해서 어떤 친구들을 만나야 할까. 이런 계획들이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다. 살짝 열어보니 내심 뿌듯했다. 여기쯤 와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 그게 뭘까. 같이 다이어리 모임을 하고 있는 친구의 말을 인용해본다.
―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거?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관리의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요즘 했던 생각은 사람들이 자기관리 하는 사람이 좋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결국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들에 신경 쓰는 행위자체를 자기관리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광범위하게 느껴지는 거고.
그렇다면 나는, 조금은 자기관리를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앞으로 더 잘해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조금은 칭찬해줘도 되지 않을까? 인영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글 에디터 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