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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렐라

나는 알약 공포증이 있다. 공포증이라고 하니 되게 병이 있는 것 같지만 의사에게 “공포증이 있네요.”라고 진단을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얕은 나의 지식으로 추리를 해 보았을 때, 나는 알약에 대해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알약을 먹을 수 있었던 시절, 나는 약을 먹고 토를 한 기억이 있다. 빈속이지만 그때 아마 계속 열이 나서 엄마가 먹으라고, 먹으라고 구박했기에 일단 먹었지만, 빈속에 쓰린 약은 게워내기 마련이었다. 그때 토를 하기 전에 그 매슥 매슥, 매슥거림, 몸 안에 진공청소기를 틀어 놓은 듯한 헛구역질. 그게 끔찍하게 싫 었다.

어렸을 때의 이런저런 기억들 때문에 지금의 나는 입에 알약을 넣고 물을 머금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맞다, 겁을 먹은 것이다. 왠지 삼키면 목에 걸릴 것 같고, 식도에 걸리면 연신 헛구역질을 해댈 것 같고, 기도로 들어가 버린다면 누군가 바로 하임리히*를 해 줄 수도 없고. 이런 온갖 걱정들이 물을 머금는 매 순간 온다. 삼키느냐 씹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선 나는 거짓말을 택했다.

내가 초등학생인 시절(2002-2007년도) 우리집은 ‘클로렐라*’를 먹었다.

(*클로렐라 : 민물에 자라는 녹조류에 속하는 단세포 생물) 일단 인기 있는 건강 식품이면 이것저것 사보는 엄마의 스타일에 맞춰 갑자기 먹게 된 식품이다. 

엄마 : “좋은거라니까? 그냥 삼켜!!! 어이구 정말?!! 하루에 5-10알씩 꼭 먹어!!!” 

누가 또 엄마에게 요즘 이게 좋다고 한건지…  

언니와 동생은 엄마가 준 클로렐라 10알을 꿀떡꿀떡 잘도 먹는다. 나는 그나마 봐줘서 5개를 배분받은 것 같다. 진한 쑥떡 색의 알약이라니 정말 먹기 싫었다. 얼마나 큰 알약이길래 거짓말을 택했을까 하시는 분들 을 위해 크기를 설명하자면 음, ‘그날엔’이라는 진통제 크기와 비슷하다. 클로렐라는 우주인의 식품으로 선정 될 만큼 좋은  영양소를 가지고 있지만, 나에겐 기도가 막힐 수 있는 이물질에 불과했다. 어렸던 나는, 그저 손에 있는 클로렐라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 이때다 싶은 타이밍이 왔다. 한 번에 5알을 입에 넣고 물을 머금었다. 그다음 알약을 혀 밑에 잘 두고 물만 삼켰다.

“아니, 이런 걸 왜 먹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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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가방 사진 _출처 : 화방넷]

세상 알약 다 먹을 듯이 쿨내를 풍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내가 다니고 있던 미술학원의 빨간 가방을 슬며시 열고 클로렐라 5알을 뱉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나는 클로렐라를 뱉었다. 오케이, 클리어. 이렇게 내 식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서, 굳이 위험한 상황을 안 만들 수 있어서 나름 뿌듯해했다. 

이렇게 나의 클로렐라 사건은 잘 지나가나 싶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가는 법이라 몇 달이 지났다. 평소처럼 하루를 보내던 내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청소를 사랑하시는 엄마가 내 자리를 청소하다가 책장 뒤에 낀 가 방이 거슬렸는지 빼서 열어보신 것이다. 엄마의 화난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고, 나는 알약을 머금었을 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뒷이야기는 어린이가 들을 수 없을 만큼 험악하고 무서운 이야기이므로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엄마가 꼽은 <한혜진, 인생의 거짓말 베스트 1위>에 선정된 레전드 이야기다. 사실 나도 잊고 있던 일화인데 당시 엄마는 꽤 충격적인 일화였는지, 물어보자마자 대답해 주셨다. 덕분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지금도 알약을 잘 못 먹는다. 새끼손톱 크기(내 손가락 기준)의 연질캡슐(젤 라틴을 원료로 하여 액상 약을 담을 때 쓰는 캡슐)이나 알약, ‘그날엔’ 정도는 심호흡하며 알약 하나에 5분 정도면 먹을 수 있긴 하다. 

혹시 나와 같은 분들이 계신다면 그만 눈물을 거둬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알약을 못 먹는 자녀를 두셨다면, 부디 혼내지 말아 주세요. 그 심리적인 공포감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니까요. 

글  디자이너 M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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