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되지 않는 수집, 그 쓸모에 관하여
[토이 스토리2]에는 우디를 훔치고, 장난감 박물관에 팔아버리려는 수집가 알이 등장한다. 우디는 프리미엄이 붙은 인형으로, 그 값어치가 상당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디는 장난감생의 최대고민을 하게 된다. 가치를 인정받고 박물관에 전시될 것인가, 앤디의 장난감으로 사용될 것인가.
장난감으로서의 삶은 고단하다. 닳고, 방치되고, 버려진다. 이미 주인은 커버렸고, 그 결말이 뻔히 보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서 깨끗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여겨질 수집품으로서의 삶을 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우디 스스로가 내린 자신의 정체성이 ‘주인과 함께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디가 외쳤고, 버즈가 외쳤다. ‘넌 장난감이야!’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 있어서 취미를 내보이는 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 사실 취미는 그 사람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써 우리는 취미 소개에 있어 고심해서 말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수집이라는 취미는 나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이다. 심지어 열정과 깊이감까지 있어 보인다. -너무 수집가의 입장인가- 그러나, 요즘 그 매력적인 취미를 말하는 것이 꺼려진다. 바로 ‘수집품을 사용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애매한 탓이다. 수집에 관련 없는 사람은 ‘그게 무슨 소리야’ 내지는 ‘아 그러시구나(어쩌라고)’ 할 테고, 수집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은 또다시 ‘그게 무슨 소리야’ 내지는 ‘수집할 줄 모르네’ 라고 할 테니 참 애매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튀고 싶어 미친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저런 주석을 달지 않으면 속인 느낌이 드니 그냥 다른 취미를 얘기한다. '독서가 취미입니다.'라고 해묵은 얘기나 하는 수밖에.
모아서 되팔다.
그러한 점에서 '토이 수집가'로 설명되는 알에게 분노가 치솟는다. 이 자식이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고, 장난감을 모으기 때문에 수집가 칭호를 줘도 되는 걸까? 그에게 장난감은 돈 벌기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유통업자'나 '리셀러'라고 부르는 게 옳다. 수집가는 취향과 추억을 모으는 사람이지 돈을 모으는 사람이 아니다. 미개봉 제품은 결코 교환,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당장 영화 관계자들은 알의 설명을 수정해 주길 바란다. 여러분들도 빌어먹을 도둑 리셀러를 수집가라고 오해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모아서 전시하다.
수집가에게는 수집가의 방이 있다-고 여겨진다. 나 또한 그랬다. 수집되는 것들은 어찌됐던 공간을 차지한다. 그게 용량이든, 부피든 말이다. 그래서 수집가에게 수집가의 방이 있다는 전제는 모두에게 '참'인 명제였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수집을 해오던 내게 수집가의 방은 염원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공간을 확보하고 나니 그 공간이 나를 위한 공간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뒀다. 장식장에 넣어두던 컵들은 부엌 찬장으로 돌아갔으며, 린넨 천에 하나의 예술품처럼 뱃지를 배치해두던 것도 관뒀다. 날 즐겁게 할 취미가 좋아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되는 아이러니함을 겪게 된 것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바라보고 싶은 것들이 모여 전시가 될 수 있지만,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몰랐다. 수집의 공간이 전시의 공간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환상 속의 그대.
수집품은 쓸모 없거나 역사학적 가치를 지녔는데, 나는 쓸모 없는 것들을 모은다.-고 엄마가 말했다. 삶이란 원래 쓸모 없는 것들로 가득 찬 법이다. 물론, 엄마에게 쥐어 박히고 싶지 않으면 침묵을 고수하고 방을 치워야 한다. 누군가가 '왜 그게 취미예요?'라고 묻는다면, 모두들 똑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니까요.' 그걸로 내 수집품의 역할은 끝났다. 누군가에게 더 아름다워 보일 필요도, 팔릴 값어치를 위해 포장지를 소중히 보관해둔 필요도 없었다. 나 편한대로 정리를 했고, 후련해졌다.
환상은 결핍을 선사한다. 내게는 아름다운 유리 케이스와 그 안의 수집품들이 그 환상의 정점이었다. 미디어 속 환상은 부러움을 만들어냈고, 나는 계속 닿지않는 환상을 쫓느라 즐겁지 않은 취미생활을 했다. 취미생활로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남들이 내게 건네는 부러움의 시선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행하는 시간과 매개체를 갖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교훈적이고 과제같은 마무리.
자본주의 아래에서, 많은 제품들이 상품가치를 뛰어넘는 잉여가치를 부여받으며 생산된다. 잉여가치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잉여가치가 없는 물건의 생명력은 터무니없이 짧고, 매력도 없다. 그러나 그 가치를 최종적으로 부여하는 건 누가 되어야 하는가? 브랜드가 만들어낸 환상에 현혹되어 스스로가 부여한 가치는 하나도 없는 물건을 소유하는 건 위험하다.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한 사랑과 권력의 상징이라는 잉여 가치를 지녔지만, 그건 단순히 ‘빛나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커플링으로 다이아반지를 맞춘 커플이 헤어졌다. 한 명은 홧김에 강에 그 반지를 던져버린다. 그 이유는 보석의 가치는 여전하지만, 사랑의 가치가 소실한 탓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값을 매길 수 없어 교환할 수 없는 물건들이 있다. 대체로 개인들의 기억을 동반한 물건들이고, 내 수집품들이 이에 속한다. 추억과 애정이 담긴 물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가치와 쓸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많은 날들 속에, 전시되지 않는 수집생활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며 그 쓸모를 다하는 중이다.
글 에디터 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