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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아 :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Tel. 1522 - 2290 ]

 여기에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호기심에 전화를 걸어볼지도 모르겠네요.

혹시나 전화를 걸었다면 낯선 여성의 목소리를 마주하게 되실 겁니다.

이 전화는 어디로 연결이 되냐고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세상의 끝’과 연결된답니다.

제가 오늘 소개 해드릴 전시는 당신이 하지 못한 말들을 모아, 세상의 끝에 놓아주는

설은아 작가의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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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도 여러 가지가 있겠죠. 오늘 아침부터 싸운 엄마, 며칠 동안 대화는커녕 카톡조차 주고받지 않은 형제나 자매, 사랑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상대, 그리고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누군가까지. 우리가 전하고 싶은 마음들은 천천히 쌓여갑니다. 아이유의 Voice Mail 이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음성사서함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잔뜩 하다가 결국에는, “취소되었습니다.”로 끝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쌓여가는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습니다. 켜켜이 쌓인 마음에는 언젠가 녹이 슬지도 모르는 일인데도요. 그런 우리에게 설은아 작가는 넌지시 묻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공간.

어떤 비난이나 충고없이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는 곳.

그런 공간이 세상에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요 ?

 그런 공간이 있다면 이용하시겠어요? 전시 공간에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오는 건 다이얼 전화와, 난데없는 공중전화뿐입니다. 옛날 전화기와 공중전화기라니. 요즘 세대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마주합니다. 2000년대에 태어난 친구들은 전화를 표현할 때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 모양을 취한다고 합니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유물’일지도 모르는 전화기들. 90년대에 태어난 제게도 다이얼 전화는 낯설지만, 어쩐지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세대와 멀어지고 시대에서 동떨어진 데에서 오는 편안함.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이대로 쉬어가도 된다고 어쩐지 위로를 전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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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를 들면 누군가가 남긴 부재중 통화라는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옵니다. 어느 누군가가 이 전시장의 공중전화에서, 혹은 이전에 열린 전시장에서, 혹은 앞서 알려드린 번호로 하지 못한 말들을 남겼을 겁니다. 앳된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멀리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흐릿하고 희미합니다. “아빠… 미안해….”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들려옵니다. 어쩐지 마음이 울컥합니다. 저도 모르게 괜찮다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버튼을 눌렀습니다. 달칵.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쳐지나갑니다. 공중전화 박스를 쳐다보았습니다. 다들 저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사람이 단 한 명, 오롯이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저 공간에서 다들 어떤 아픈 마음을 꺼냈을까요. 

 2018.12월부터 2019.10월까지 부재중 통화는 총 41,756통이 쌓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어느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는데 총 200,920건이었습니다. 말하는 사람보다 들어준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공간에 자리한 저는 그 수치가 너무나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런 공간이 주어진다고 모두가 편안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태까지 하지 못했던 말들은 다 이유가 있고, 속에서 꺼내는 순간 곪은 게 터져버릴까 무서운 이야기들도 있으니까요. 바로 저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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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중전화 박스 안에 들어서면 공중전화가 있습니다. 타디스를 생각하고는 웃음이 났습니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세상 어딘가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가 이야기를 하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는 것,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은 외로움을 올리는 자리같다는 글. 저는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가끔 글로 꺼내놓곤 합니다. 다들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봤으면 모른 척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제 외로움을 입으로 뱉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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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2018년 12월부터 이 주제로 벌써 6번이나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부터 현대백화점, PIPFF 남북 평창 평화 영화제, 밤길걷기 페스티벌, 용산전쟁기념관, 연남장까지. 그리고 7번째 개인전으로 서울미술관에서 또 한 번 부재중 통화를 수집합니다. 그런데 전 전시관에서는 볼 수 없던 공간이 생겼습니다. 바처럼 보이는 공간인데요. 처음으로 글로 남겨보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저처럼 이야기를 입으로 내뱉는 게 힘든 사람들을 위한 작가의 배려인지, 그녀의 또 다른 프로젝트의 시작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작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하지 못한 말들을 모아, 세상의 끝으로 갑니다. 누군가에게 수신되기도 했고, 부재중으로 남았을 지도 모르는 말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서 놓아진 우리의 목소리들을 영상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바람소리가 겹쳐질 때마다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이 마음들이 흘러가는 게 느껴집니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그 마음들이 어디론가, 좋은 자리를 찾아서 떠나가고 있다고.

누군가가 전하지 못한 마음을, 수집하고 있는 이 전시가 흥미로워서 발걸음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이야기를 따라오셨다면 이 전시가 ‘수집’에 국한된 전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이 전시의 의의는 ‘방출’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한 말들은 어쩌면 우리가 놓아주지 못한 마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우리가 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나 당신에게도 놓아주지 못하는 마음이, 말들이, 사람이 있다면,

추천하는 이 달의 전시.

하지 못한 말을 놓아주다.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였습니다.

일정 2019.10.29.-2020.2.29.

장소 석파정 서울 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201번지 석파정 서울미술관)

휴관일 매주 월요일

운영시간 10:00 – 18:00
작가 설은아 http://seoleuna.com/

글  에디터 ㅊ

​사진  @wisky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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